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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신화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개념

by 다다다맘 2024.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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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서 신화는 생활의 중심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신화를 그들의 역사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그들은 자연현상과 문화적 변화, 옛습관 그대로 내려오는 증오와 친교를 설명하는데 신화를 사용하였다. 

한지도가 신화적 영웅, 또는 신의 후손이라는 증거로 사용할수있는 자부심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설명하는 트로이 전쟁의 진실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스 인들에게 호메로스 서사시의 심오한 지식은 그들의 문화 변화의 기저로 간주되었다.

호메로스는 "그리스의 학문"이었고 그의 시는 한권의 "책" 이었다. 

그리스로마신화 연구를한 철학자 플라톤

철학과 신화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철학과 역사, 산문과 합리주의가 등장한이후,

신화의 미래는 불투명해졌고 , 신화적 계보도가 포함되던 역사의 구상에서도 초자연적인 요소가 배제되었다. 

 

일부 급진 철하자들은 이미 기원전 6세기부터 시인들의 이야기를 신성 모독적인 거짓말로 여겼다.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그려낸 신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는 인간에게 속하는 모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들을 신들에게 귀속시켰다. 간통, 절도, 서로 기만하는 일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플라톤의 <국가> , <법률>에서도 찾을수있다. 플라톤은 자신만의 우의적인 신화를 만들었고 신들의 부도덕한 속임수 , 간통, 도둑질등을 소재로 하는 구비설화를 비판하였으며, 문학 작품에서 그들이 중심 역할로 등장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신화를 "늙은 아내의 수다" 로 비유한 플라톤의 비판은 호메로스 신화 전통에 반하는 최초의 중대한 도전이었다.

 

이러한 비판에도 플라톤은 그 자신과 그의 집단을 신화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었다.

그 예로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서술은 철학자들이 스승의 정직한 삶을 찬양할때 사용되는 전통적인 서사시풍의 비극 양식을 바탕으로 하였다.  

 

보다 적극적으로 기원전 5세기의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종종 오래된 전통을 비웃는 연극을 제작하였고 그가 창조한 배역의 목소리를 빌어 의심의 어조를 담아내었다. 그가 제작한 연극은 언제나 예외없이 신화를 주제로 행해졌다.

이러한 연극들은 과거에 같거나 비슷한 신화를 소재로 쓰인 연극의 회답으로 쓰여졌다. 에우리피데서는 주로 신에 대한 신화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과거 크레노크라테스의 표현과 반대에 근거를 둔 비판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묘사된 신들은 너무 어리석게도 인간과 닮았다"

 

 

그리스로마신화 헬레니즘 키프로스 철학자

헬리니즘과 로마 합리주의

헬레니즘 시대 신화는 일정 신분만이 누릴수 있는 일류 엘리트 지식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동시에 고전 시대의 회의적인 성향 또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스신화 수집가 에우헤메로스는 신화적 존재와 사건이 기초로 하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찾는 관례를 확립하였다.

그의 본래작품은 유실되었지만 디오도로스와 락탄티우스가 기록한 자료를 통해서 이 작품이 담고 있는 대부분의 내용이 알려져 있다. 

 

로마 제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신화 해석학의 합리화는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의 물리주의 이론의 영향으로 대중에게 높은 관심을 받았다. 유헤메로스 학파가 신화를 역사적 형태로 합리화한 반면에, 

스토아 학파는 신과 영웅에 대한 설명을 물리적 현상으로 해석하였다. 

이와 더불어 스토아와 신플라톤주의 철하자들은 신화적 전통의 도덕적 의의를 강조하기도 하였는데 ,

이것은 주로 그리스 어원에 바탕을 두었다.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가르침을 통해 그를 따르는 시민들의 마음에 사로잡힌 미신의 두려움을 쫓고자 하였다. 리비우스 또한 신화적 전통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전설과 같은 이야기에 대해 직접 판단을 내리고자 할 의도는 없다고 밝혔다. 

로마인들에 대한 이러한 도전은 종교적 전통의 강력하고 변증적인 관념을 동반하였으며,

전통이 종종 미신의 온상이 되는 것을 방어하기도 했다. 

고전학자 바로는 종교는 인간의 제도이며, 사회의 선을 보호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고,

종교적 숭배의 기원에 대한 엄밀한 연구에 헌신하였다. 

그의 저서인 <신의 역사>에서 바로는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신을 두려워하는 반면, 

경건한 사람은 그들을 부모로써 공경한다고 주장하였다.

바로에 따르면, 로마 사회에서 신은 시인이 연극과 오락을 위해 만들어낸 신화적 가치,도시와 사람들이 숭배를 위해 이용하는 시민적 가치, 철학자가 만들어낸 자연적 가치의 세가지 가치로 구분된다. 

바로는 시민의 신학이 시적이고 신화적인 가치, 철학자의 가치와 결합된 곳이 최고의 국가라고 하였다.

 

융화하는 경향

고대 로마 시대에는 그리스와 다른 외래의 수많은 신들이 융합된 로마 신화가 새롭게 등장했다.

로마 신화가 이러한 생겨나게 된 이유는 로마인들만의 신화가 적었기 때문이며, 

주요 로마 신들이 그리스의 대등한 신들의 특징을 답습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리스의 신화적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도 볼수 있다. 

주요신인 제우스와 유피테르는 이러한 신화적 공통점의 좋은 예이다.

두 신화적 전통의 결합에 더불어 새롭게 유입된 동방 종교는 더욱 심화된 융합을 이끌었다.

예를 들어 태양 숭배 문화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시리아 출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에 로마에 들어온 것이다.

아시아의 신 미트라와 바알은 아폴론과 헬리오스에 융합되어 하나의 태양신 솔 인빅투스가 되었고

집성 의식을 받으며 혼합된 속성을 띄게 되었다.

아폴론은 종교에세 헬리오스, 또는 심지어 디오니소스와 점점 동일시되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신화를 개적한 문헌에서는 이러한 발달을 반영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전승 문학 신화는 실제 종교적 관습에서 갈수록 더 분리되었다. 

 

2세기 오르페우스 찬과 모음집과 5세기 마크로비우스 암브로시우스 테오도시우스의 <사투르날리아>는 융화 경향과 바합리주의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오르페우스 찬가는 고전 이전의 시적인 구성을 취하며, 유명한 신화주인공인 오르페우스가 썼다고 전한다. 실제 이 시들은 몇명의 시인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며, 선사 유럽 신화에 대한 줄거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사투르날리아>의 목적은 마크로비우스 자신이 읽은 자료를 통해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는것이었으나 신에 대한 시각은 베르길리우스의 해석에도 영향을 미친 이집트와 북부 아프리카 신화, 신학의 색채를 띄었다. <사투르날리아>에서는 유헤메로스, 스토아, 신플라톤주의 철하자들의 영향을 받은 신화학적 의견이 다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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